e북이 팔리지 않는 이유

10여 년 전, 대학 졸업반이었던 필자는 모 제지 업체에 취직한 적이 있다. 공대 출신인 터라 신입사원 연수 후 지방의 제지 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는 ‘사무전산화’니 ‘종이 없는 사무실’이니 하는 구호가 넘치면서 제지 산업이 곧 사라질 사양 산업으로 비칠 때였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탓인지 필자는 발령을 거부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사양 산업은커녕 PC 보급과 함께 종이의 쓰임새가 더욱 늘이나 유망 산업으로 발전한 지금의 제지 산업을 보면, 당시 세상 물정 모르던 철부지 학생이었던 필자의 선택이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필자를 포함해 IT에 대한 식견이 높은 지디넷 독자분 역시 비슷한 우를 범한 경험이 한 두 번쯤 있지 않을까 싶다. IT가 가져다주는 생산성과 효율, 그리고 혁신성에 취한 나머지, 현실의 흐름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앞서 나간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른 경험 말이다.

90년대 이후 컴퓨팅 기술의 발전과 인터넷의 보급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IT에 대한 기대와 기술만능주의를 불러일으켰다. 마치 산업혁명 직후 ‘과학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19세기 말 유럽인들의 생각과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우리는 역사와 경험을 통해 이러한 기술만능주의가 결코 우리에게 혜택과 기쁨만을 선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가치가 최신의 기술보다 더 유용할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책’이다.

■ 종이책 vs e북(e-Book)

PC가 등장하고 모니터를 이용해 활자를 접하게 되자 책의 미래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이들이 늘어났다. 한 장씩 넘기는 종이 묶음 대신 비트로 이뤄진 문자 데이터를 통해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e북이다.

종이책과 비교해 e북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종이에 활자를 인쇄하지 않아도 되고, 서점이라는 유통 경로를 통하지 않고 인터넷 등 온라인으로 독자에게 직접 배포가 가능하기 때문에 대폭적인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

저작과 편집 외에 다른 프로세스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제작 과정도 단순하다. 독자 역시 원하는 읽을거리를 저렴한 가격에 간편하게 구입해 읽을 수 있고, 책장이라는 거추장스런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된다. 수백 권의 책을 작은 e북 단말기에 모두 저장해 두고 읽을 수 있다.

아마존이 지난 2007년 내놓은 359달러짜리 e북 단말기 킨들(Kindle)은 이러한 e북의 장점을 결집한 혁신적인 제품이다. LCD가 아닌 전자 잉크를 사용한 킨들은 마치 종이책처럼 자연스러운 독서가 가능하고 작고 가벼워서 휴대성도 좋다.

출시 1년 만에 24만 대의 킨들 단말기가 팔렸고, 아마존이 보유한 풍부한 e북 콘텐츠를 2~10달러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킨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단말기와 e북 콘텐츠 판매를 통해 아마존이 거둬들인 수익이 1억 달러에 달한다는 예측도 있다. 매출뿐만 아니라 기존 아날로그 시장을 디지털 시장으로 새롭게 변모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킨들의 히트로 아마존이 고무되어 있긴 하지만, 현재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e북 제품의 성공 사례는 킨들이 유일하다. 킨들의 매출도 따지고 들면 스티븐 킹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 1명의 연간 인세 수입 정도에 불과하다.

e북에 투자하기보다 베스트셀러 작가 1~2명과 거래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얘기다. 전체 출판 시장에 비하면 여전히 실험적인 시장인 셈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에서 종이책을 주문해 읽고 있으며 e북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국내 상황은 어떨까? IT 선진국을 자처하는 한국 역시 일찌감치 e북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성공 사례는 아직 전무하다. 1999년 120여 개 출판사가 자본금을 모아서 설립한 국내 최대의 e북 전문업체인 ‘북토피아’가 최근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2007년 기준으로 연간 1,200억 원 규모로 추산되고 있는 국내 e북 시장이지만, 실제 e북 단말기나 e북 콘텐츠 판매량은 집계를 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다. 저작권 보호가 되어 있지 않은 텍스트 파일의 e북 콘텐츠를 PC나 PMP, 휴대폰에 저장해 읽는 사람조차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왜 e북이 뜨지 않는 걸까?

■ 사람들이 종이책을 고집하는 이유

e북에 비해 종이책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고가 아닌 하나의 문화이자 지식, 교양 그 자체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평범한 사람의 식습관마저 바꾸기 쉽지 않은 마당에 2천 년에 가까운 전통을 지진 종이책에 대한 인류의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PC와 인터넷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의 발명에 가깝다면 e북은 오랜 전통과 관습의 결과물인 종이책과 경쟁해야 한다. 처음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다.

책은 완독이라는 1차적인 용도가 다한 뒤에도 지식의 보관과 시각적 과시성이라는 2차적인 용도를 지닌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책장 가득한 서재를 꾸며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비물질적인 정보를 물질화시켰다는 측면에서 책은 그 자체로 지식과 교양의 척도로 취급된다.

반면, e북은 그저 정보일 뿐이다. 수천 권의 책이 e북 단말기에 담겨 있다 한들,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닌 탓에 독서라는 1차적 용도가 끝나면 쓸모가 없다. 수백 권의 책이 가득한 서재를 자랑하는 이는 있어도 수 기가바이트의 e북 콘텐츠가 담긴 e북 단말기를 자랑하는 이는 없다.

간편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언제 어디서라도 약간의 불빛만 있으면 다른 어떤 외부의 도움 없이 읽을 수 있고 어디라도 놓아둘 수 있는 것이 종이책이다. 그러나 e북 단말기는 스위치를 켜서 특정 페이지로 이동해야 한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단말기라는 전자 부품으로 이뤄진 하드웨어와 전기 동력을 필요로 한다. 수십만 원씩 하는 비싼 단말기를 아무 데나 놓아둘 수도 없다.

보존성과 신뢰성도 e북과 종이책을 나누게 한다.

책은 콘텐츠와 하드웨어가 하나로 결합해 있으므로 보존만 잘하면 수백 년이 지나도 담겨 있는 정보를 접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e북은 콘텐츠와 하드웨어가 분리되어 있다. 물질화되지 않은 콘텐츠는 단말기라는 하드웨어의 변화나 고장, 오작동 등에 의해 쉽게 훼손된다. 정보의 보존성이 낮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잠재적인 불안을 일으키게 한다. 책이 지닌 무한한 신뢰성에 비해 e북은 태성적으로 신뢰성이 낮다.

비용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e북 콘텐츠가 편당 1달러 정도로 저렴하다 해도 수백 달러에 이르는 e북 단말기는 별도로 구입해야 한다. 2007년 초 국내에 잠시 선보인 소니 e북 단말기의 가격은 50만 원이 넘었다. 앞으로 점차 e북 단말기의 가격이 낮아지겠지만, 정보를 접하기 위한 초기 비용의 측면에서 e북은 아직 종이책의 가격 경쟁력에 당하지 못한다. 당장 신간서적 50권과 e북 단말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필자는 1초의 고민도 없이 종이책을 선택할 것이다.

무엇보다 e북의 가장 큰 한계는 콘텐츠다.

이론적으로 무한대의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 e북이지만, 실제 사용자가 구입할 수 있는 e북 콘텐츠는 극소량에 불과하다. 고전이나 베스트셀러 등 몇몇 인기 콘텐츠를 제외하면 다양한 콘텐츠를 구하기 어렵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쉽게 복제, 유포가 가능한 e북 콘텐츠에 대한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저작권 보호 장치가 있다곤 하나, 이미 잘 갖춰진 인쇄와 유통 시스템을 가진 종이책과 비교해 투자 가치가 떨어진다. 영세한 출판 업계의 사정이 장기 투자를 더욱 꺼리게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 e북이 놓치지 않아야 할 시장

아직까지 사회적 인식과 간편성, 속도, 신뢰성, 인식, 비용 등 책이 지난 복합적인 경쟁력에 비해 e북의 경쟁력이 낮다. 그러나 현재 e북이 지닌 단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극복될 것이며, 장점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e북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려면 종이책을 직접 대체하기 보다 e북이 가진 멀티미디어와 정보 갱신, 대용량과 확장성 등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e북이 활용되어야 한다.

e북은 지금 당장에라도 초중고 및 대학 교재를 대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교재는 책의 일종이면서도 일반 도서와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 교재에 담긴 정보가 일정 기간의 수명을 지니고 있고, 그 수명을 다하면 갱신해야 한다. 학생이 주된 독자인 터라 한 번 읽고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 읽어야 한다. 또한, 활자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동영상, 음향 효과 등 멀티미디어 기능도 필요로 한다. 종이책보다 e북이 더 적합한 분야인 셈이다.

무거운 책가방과 사물함에 쌓인 교재 대신 가볍고 작은 e북 단말기가 제격이다. 교육 콘텐츠 역시 특정 영역에 전문화되어 있고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콘텐츠 부족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단말기 초기 도입가의 경우 정부나 학교의 보조금 지급을 통해 낮출 수 있으며, 콘텐츠 공급과 유통에 비용이 크게 들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인 총소유비용은 종이책에 버금간다. 최소 3년 이상 장기간 쓰이기 때문에 이 비용은 더 줄일 여지가 있다.

도서관 역시 e북을 위한 시장 중 하나이다.

구글이 도서관 정보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도서관의 콘텐츠가 디지털화된다면 책 대여가 아닌 e북 대여를 통해 도서관 운영이 가능해진다. 이용자가 쉽게 도서 검색과 온라인 대여가 가능하고 값비싼 e북 단말기를 직접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e북의 경쟁력이 돋보이는 시장이다.

휴대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인 1휴대폰 시대가 도래한 지금 별도의 e북 단말기보다 기존 휴대폰을 e북 플랫폼으로 활용한다는 발상이다. 화면의 크기나 가독성 등 제한이 있긴 하지만, 장르 소설, 뉴스, 에세이 등 비교적 가벼운 e북 콘텐츠라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휴대폰을 이용한 e북 시장이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10대 소녀층을 대상으로 한 휴대폰 소설 작품인 Deep Love와 연공(恋空) 등의 작품이 히트하면서 휴대폰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까지 태어났다. 휴대폰의 경우 편리한 무선 유통망과 합리적인 과금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익성 측면에서도 유리한 시장이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신문과 잡지 시장에 e북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생기고 있다.

일본 후지쯔가 마이니치 신문과 제휴해 e신문 단말기를 식당과 공공장소에 보급한다는 계획이 있다. 신문과 잡지 콘텐츠를 공급하는 새로운 채널이 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가능성 있는 시장이다. 그러나 신문과 잡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콘텐츠와 이를 담은 매체가 동시에 가치가 사라지는 휘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이미 다 본 신문은 휴지통이나 화장실 한켠에 버릴 수 있지만, e신문 단말기는 그럴 수 없다. 더구나 속보성을 갖는 신문은 인터넷 미디어와도 경쟁해야 한다. e북의 장점이 십분 발휘되기 어려운 분야이다.

■ e북의 미래

당장 e북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e북은 물론 출판 시장 자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e북이 가진 잠재력과 혁신성은 종이책과 경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충분한 콘텐츠, 저렴한 단말기가 보급되길 하염없이 기다리기보다는 e북이 가진 장점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 우선 뿌리내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정책적인 지원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선 업계 스스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이를 시현할 수 있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출판 콘텐츠와 하드웨어 단말기, 두 부문으로 나뉘어 있는 e북 시장의 통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콘텐츠 없는 하드웨어, 하드웨어 없는 콘텐츠는 의미가 없다. 아마존 킨들의 사례처럼 콘텐츠와 하드웨어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분야(그것이 교육이든 휴대폰이든)에 집중하는 것이 e북 시장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돌파구 중 하나일 것이다.

* 본 칼럼은 2009년 2월 20일 ZDnet Korea에 기고한 칼럼입니다.